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- 2008/03/26 경외와 기독교인의 삶
<매일성경 3/26 본문> 출1:1-22
오늘부터 출애굽기가 시작되었다.
본문의 내용은,
애굽에서 번성한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가 탄압하기 시작하는 첫부분으로, 이스라엘의 신생아 중 남자아이들을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과 그 명령을 거역한 산파들의 이야기다.
17절, "그러나 산파들이 [하나님을 두려워하여] [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] 남자를 살린지라"
이 구절에서는 '보이지 않는 하나님'과 '보이는 애굽 왕' 중 누구를 더 두려워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.
[1]
우선 '보이는 애굽 왕'에 대해 생각해 보면, 반드시 대통령이나 높은 사람에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.
'하나님을 배제하는 세상의 모든 것'이라고 소극적으로 규정해 볼 수 있겠다.
따라서, 권력자 이외에 이 세상의 온갖 법, 규칙, 가치관 등도 포함된다.
문제는, 나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을 '거역하고서' 하나님을 따를 수 있겠는가 이다.
특히, 나의 생명 혹은 중요한 지위를 빼앗길 수 있는 상황에서 '거역할 수 있겠는가'이다.
거역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한가지다.
하나님을 '두려워하는 것(경외)'이다.
[2]
21절, "산파는 하나님을 [경외]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[왕성케 하신지라]"
누구를 더 두려워하는가의 문제는 곧, '얼마나 앞을 내다볼 수 있는가'의 문제이기도 하다.
당장 눈앞의 상황만을 바라본다면, 결코 그 상황을 '거역할 수가 없다.' 특히, 요즘같이 생활이 불안정한 때일 수록 거역하기 쉽지 않다. '금강산도 식후경'이라는 말도 있잖은가.
그런 의미에서 산파들은 앞을 내다볼 줄 알았다. 물론 산파들이 그들의 집이 왕성해질 것을 기대했다고 볼 수는 없다.
다만, 하나님을 거역했을 경우 자신들에게 닥치게 될 어떤 '심각한' 상황에 대해 생각해봤을 것이다. 바로를 거역했을 때의 결과와 하나님을 거역했을 때의 결과를 비교해 봤을 것이다. 아니면 비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 결과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.
그 결과를 잘 알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었던 것이다. 기대하지 않았던 복도 덩달아 따라오게 되었다.
[3]
그렇다면, '경외'란 정확히 무엇일까? 아쉽게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.
안타까운 것은 내가 하나님을 과연 경외하는가에 대해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.
하지만, 한 가지 힌트를 얻은 것이 있다. 그것은 반드시 '경외'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요하다.
그것은 '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'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.
[4]
지금은 '경외'라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고 잘 와닿지는 않지만, 산파의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, '하나님을 경외'하기 위해서는 '계산을 잘 해야한다'는 것이다.
다시 말해, 나의 현재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에 대해 '항상 하나님의 관점에서 잘 생각해 봐야 한다'는 것이다.
소크라테스가 그랬던가. '악법도 법이다'라고.(그래서 따랐다.)
하지만 나는 반박하고 싶다. '악법도 법이기는 하지만, 따라야 하는지는 잘 생각해봐야 한다'고.
'경외'라는 단어는 추상적인 단어다.(앞 글 '마음을 연다?'와 같은 맥락)
그러나 기독교인은 추상적인 단어인 '경외'를 구체화시켜야 한다. 막연히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,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음이 우리의 삶에 보여져야 한다.
더 나아가 우리가 아는 '온갖 추상적인 말들(믿음, 소망, 사랑 등)을 삶으로 구체화'시켜야 한다.('사랑'에 대해서도 곧 고찰해 볼 예정)
이것이 기독교인이 살아내야 할 삶이다.
하나님은 영(보이지도 않고 추상적)이시나, 예수님은 육(구체적)으로 오셨다. 하나님에 대해 추상적으로만 알던 인간에게, 하나님은 당신을 '구체적'으로 나타내 주셨다.
기독교인들은 말은 잘한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.
말이 허공에서 맴돌다 말면 추상적인 것으로 끝나지만, 그 말대로 살아낸다면 그 말은 구체적인 것이 된다.
이제 내 삶의 한 가지 목적(어쩌면 궁극적인 목적)은 '추상의 구체화'가 되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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